역내청

[하야하치] 포카리스웨트

무인중 2017. 11. 26. 03:11





오늘따라 항상 마시던 맥스캔이 당기지 않았다. 물론 맥스캔이 싫다는 건 아니고, 그냥 이유없이 우중충한 기분이라 달짝지근한 커피가 아닌 무언가 내 기분을 바꿔줄 수 있는 청량한 음료를 마시고 싶었던 것 뿐이었다. 그렇게 자판기 앞에서 주위에 사람이 있는지 두리번거리며 무엇을 마실 지에 대해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비장한 표정으로 버튼 하나를 꾹 눌렀다. 삐- 덜거덕, 무언가가 자판기 내부에 여러 번 부딪히면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그 소리의 근원지로 고개를 숙여 물기가 살짝 묻어있는 시원한 플라스틱 병을 가볍게 집어 들었다. '으, 시원해.' 손에 느껴지는 기분 좋은 찬 기운을 조금 느끼다가 뚜껑을 열어  병 입구에 입을 붙였다.



꿀꺽하고 음료를 삼킨 순간, 입안에서 느껴지는 오묘한 달콤함과 목구멍을 타고 흘러가는 시원한 느낌에 이유없던 나의 우중충한 기분이 살짝 개어진 듯했다. 이 놀라운 변화에 나는 눈을 크게 뜬 후 입을 떼고 "크으-"라며 조금은 과장된 소리를 냈다. 그때 바스락, 하고 뒤에서 나는 작은 소리에 행여나 이 기분 나쁜 행동을 누군가 봤을까 급하게 시선을 병에 돌렸고 손에 대충 쥐어져있던 병을 자세히 보는 척을 하니 자신이 청량하다는 걸 매우 열심히 알리고 있는 포카리스웨트의 파란색 상표가 보였다.



'진짜 안 어울리네.'



체육계 남학생도 아닌 주제에 상쾌하게 포카리스웨트를 마시고 있다는 이 상황이 어이가 없고 웃겼다. 나는 혹시 음료가 미지근해지지 않을까하고 병을 다른 손에 옮겨 쥔 후에 교실로 가고 있었던 발걸음을 마저 옮겼다. 그와 동시에 자판기에서 새파란 바탕에 흰색으로 정갈하게 이름이 적혀있는 이 놈을 보자마자 떠올랐던 한 인물을 기억해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목적지로 향하는 내내 목구멍에 아직 남아있는 음료의 달큰한 맛처럼 바람이 기분좋게 불었고 점점 가까워지는 운동장에서는 마침 경기가 끝난 듯 삐익-대는 휘슬 소리와 "꺄꺄"대며 사람들이 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소리가 거슬리는 것처럼 살짝 눈을 찌푸렸다가 가까스로 건물 코너를 돌았다. 코너를 나오자마자 보인 것은 아직 열기가 식지 않은 운동장이었다. 벤치에 앉아서 분을 삭히고 있는 몇, 운동장 바닥에 앉아 승리를 만끽하고 있는 몇, 땀을 식히려는 듯 목에 수건을 두르고 옷을 펄럭이고 있는 몇 명의 학생들. 운동장에는 꽤나 사람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있던 곳은 단연 오늘 경기의 MVP일 축구부 주장, 하야마 하야토의 주위 되시겠다.



"크으- 하야마, 네 덕분이야!"

"하야마군, 드링크 여깄어-"

"앗, 하야마! 여기도 드링크!"

"하야토, 역시 너 없으면 안 된다니까? 앞으로도 믿는다!"

"여, 여기 하야토, 드링크!"



경기 후에 숨을 고르며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고 있던 하야마의 주위에는 남학생, 여학생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자신들이 이긴 것에 만족하며 대활약을 한 하야마를 치켜세우는 무리들, 경쟁처럼 하야마에게 자신이 준비한 드링크를 주려는 무리들이 웅성이고 있었다. '아, 오늘은 별로 보고 싶지 않았는데.'라고 생각하며 그를 작은 눈으로 바라보자 멀리서 보기에도 그는 딱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내가 한참동안 고민한 끝에 골라 뽑은 포카리스웨트를 그는 동시에 여러 병을 권유받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모습에 약간 통쾌함을 느끼며 계속 쥐고 있어 살짝 미지근해진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나서 하야토와, 하야마를 포함한 그의 무리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지나가려 했다.



그때 운동장의 시선이 갑자기 나에게 박히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내가 하야마의 불행에 행복하다고 생각한 것을 들킨 건가, 하며 별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던 중, 그들의 시선이 내가 아닌 내쪽으로 걸어오고 있던 하야마에게 집중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가 왜 내쪽으로 오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려던 도중 내 손에서 무언가가 쑥, 하고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에,"

"아, 히키타니군. 마침 목이 마르던 참이었는데 고마워."

"... 너 뭐하냐"

"하하... 나중에 꼭 살게."



언제 다가왔는지도 모르게 하야마는 내 눈앞에서 내 손에 쥐어있던 내 포카리스웨트를 빼가더니 보란듯이 한 모금 마셨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매우 당황스럽기만 했다. 나는 당황스러움을 감춘 후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짓고 하야마에게 뭐하는 거냐고 묻자 그는 내가 먼저 권유했다는 것마냥 "고맙다"며 답했다.



사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았겠지만 그는 상당히 머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후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하야마의 돌발 행동에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이유는 당연하게도 내 포카리스웨트가 진짜 주인을 찾아갔기 때문 아닐까 생각한다. 아주 잠깐이었기 때문에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음료를 마실 때 그의 밝은 갈색 머리카락과 뒤로 젖혀 곡선을 만든 목을 타고 내려오는 땀방울의 형태, 자주 향수를 뿌린 듯 쿨워터향과 그의 체액의 향이 오묘하게 섞여서 나는 유니폼의 냄새는 남자 고등학생이 소유할 수 있는 청량함의 끝이었다. 내가 상상했었던 '청량' 그 자체. 내 음료를 들며 어삭한 웃음을 짓고 있는 호감형인 그를 보고있자니 아까의 내가 떠올라 자괴감이 들었다. (술을 마신듯이 이상한 소리를 냈던 것 말이다.)



나는 그의 어색하고도 잘생긴 얼굴에 괜히 속이 어질러져서 땅바닥에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기분뿐만 아니라 나까지 청량해진 기분이었는데 방금 일로 처음보다 더 우중충한 기분이 되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하야마에게 음료수를 돌려받으면 기분이 더 악화될 것 같아 포카리스웨트가 있던 손을 푹, 호주머니에 꽂았다.



"그냥 그거 너 마셔."

"아, 아니 그래도-"

"맥스캔 마실 거라서 상관없다."

"... 아, 그래? 그럼 잘 마실게. 히키가야."



하야마는 내 마음을 알았다는 듯 살풋 웃으며 포카리스웨트를 살짝 흔들며 고맙다고 하고는 운동장으로 다시 돌아갔다. 나와 하야마에 몰려있던 시선을 거두어가는 사람들에 조금 살 것 같았다. 그가 의도한 것처럼 '하야마가 친한 남학생이나 여학생들 중 하나가 아닌 그와 전혀 관련이 없는 음침한 학생의 음료를 마셨다'는 것을 확인하였기 때문이겠지. 청량남 하야마가 떠나 도로 음침해진 공기 중에는 아직 그의 시원한 쿨워터향이 남아있는 기분이었다.



'기분 나빠...'



앞에 누군가 있을리가 없으면서도 그 향과 이미지 하나로 하야마가 앞에 서있는 기분이 들었다. 무의식적으로 그를 내 머리 속에 담고 있었다는 사실이 짜증나 고개를 흔들었고 고개를 내 자존심만큼 푹 숙인 후에 가던 길을 마저 걸었다ㅡ



"아, 그럼 잘 마실게. 히키가야."

히키가야.



ㅡ다시는, 포카리스웨트를, 마시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말이다.